3월 정기모임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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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홍진 작성일16-02-23 19:15 조회1,251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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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 년 3 월 화수분독서회 모임안내 ≫
1. 일 시 : 2016. 3. 13 (일) 오후2시
2. 장 소 : 창원 의창도서관 3층 디지털 자료실 옆
3. 토론도서 : " 백범 일지. " / 김구 지음 / 돌베게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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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 : 정은순 님
참으로 진솔하고 감동적인 기록- 백범일지
전문연구자의 원전비평에 기초한 완벽한 정본
백범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는 친필 원본은 물론 등사본과 필사본, 여러 가지 출간본 등
여러 저본을 일일이 면밀하게 검토, 대조했다.
또한 사전류는 물론 고전, 규장각 자료 등의 고문서, 수많은 회고록, 일본, 중국 등 해외의
임정 관계 자료까지 두루 활용하고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로부터 자문을 받아 원본의 미흡한
점과 착오 등을 수정, 보완했다.
27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어온 민족독립운동가이자, 자신의 전 생애를 조국과 민족을
위해 바친 겨레의 큰 스승인 백범의 삶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저자소개>
저자 :김구
본관 안동. 호 백범(白凡). 아명 창암(昌岩). 본명 창수(昌洙). 개명하여 구(龜,九).
법명 원종(圓宗). 초호 연하(蓮下). 황해도 해주 출생. 15세 때 한학자 정문재(鄭文哉)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1893년 동학(東學)에 입교하여 접주(接主)가 되고 이듬해
팔봉도소접주(八峯都所接主)에 임명되어 해주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게 쫓겨
1895년 만주로 피신하여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단에 가입하였다.
이듬해 귀국, 일본인에게 시해당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군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살해하고 체포되어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종의 특사로
감형되었다. 복역 중 1898년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麻谷寺)의 승려가 되었다가
이듬해 환속(還俗), 1903년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9년 황해도 안악의 양산학교 교사로 있다가 이듬해 신민회(新民會)에 참가하고,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감형으로 1911년 출옥하여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 농장 농감(農監)이 되어 농촌을 계몽하였다.
3·1운동 후 상하이[上海]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경무국장(警務局長)·
내무총장·국무령(國務領)을 역임하면서, 1928년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 총재가 되었다.
이로부터 항일무력활동을 시작, 결사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 1932년
일본왕 사쿠라다몬[櫻田門] 저격사건,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 일본왕 생일축하식장의
폭탄투척사건 등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 등의 의거를 지휘하였다.
1933년 난징[南京]에서 장제스[蔣介石]를 만나 한국인 무관학교 설치와 대(對)
일본전투방책을 협의하고 19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하였으며,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옮길 때 이를 통솔하였고,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 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을 임명하고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임되었다.
1945년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를 하는 한편, 광복군 낙하산부대를 편성하여 본국 상륙훈련을 실시하다가 8·15광복으로 귀국하였는데, 임시정부가 미군정으로부터 정부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였으므로 한국독립당 위원장으로서 모스크바 3상회의 성명을 반박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였다.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 부의장, 민주의원 부의장, 민족통일총본부를 이승만(李承晩)·김규식(金奎植)과 함께 이끌면서 극우파로 활약하였다. 1948년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연합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하였다. 그 후 북한으로 들어가 정치회담을 열었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정부수립에 참가하지 않고 중간파의 거두로 있다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으며, 저서로는 《백범일지(白凡逸志)》가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출판사 서평>
본격적인 원전비평으로 정본화에 완벽을 기한 『백범일지』
일반적으로 역사적 문헌에 대한 원전비평(textual criticism)은 매우 중요한 독자의 연구 영역으로 인정되고 있다. 더욱이 20여 종 이상의 다양한 출간본을 지닌 『백범일지』의 경우 원전비평의 필요성은 그만큼 절실하다.
『백범일지』는 만리타국에서 변변한 자료나 보조원 하나 없이 과거의 기억을 더듬으며 일정한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몰아 집필한 것이다. 따라서 원본에는 목차도 미처 완비되어 있지 않으며 서술내용에서 시기가 모순되는 경우도 있고 인명?지명 등에도 착오가 적지 않다. 즉 『백범일지』는 정연한 체계로 다듬어지기 전의 수고(手稿, Manuscript)인 것이다. 이러한 점이 『백범일지』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을 일일이 보완하고 바로잡는 일은 지금 새롭게 『백범일지』를 출간하는 시점에서 반드시 해내야 할 필수적인 작업이다. 그래야만 판을 거듭함에 따라 생기는 와전을 수정하고, 텍스트(text) 본래의 순수성(purity)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이 원전비평의 기준으로 삼은 5대 교감 원칙
1. 현대성의 원칙
: 국한문 혼용의 어렵고 난삽한 고문을 쉬운 현대문으로 교열하였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잘못된 교열을 수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어물쩍 넘긴 용어?개념?경구문장의 적확한 뜻을 일일이 찾아 번역하였다.
2. 순수성의 원칙
: 원문의 감동과 내용을 털끝만큼이라도 손상시켜서는 안된다는 원칙을 현대성의 원칙 이상으로 중요하게 고려하여, 백범의 호흡이 긴 문체는 살리고, 글자 한자 한자를 원본과 철저하게 대조하였으며, 의역과 수정이 불가피한 경우 원문을 본문이나 각주에 밝혔다.
3. 비평성의 원칙
: 『백범일지』는 별다른 자료 없이 기록한 수고(手稿)이기 때문에 날짜와 인명의 혼란, 문장의 중복과 선후가 뒤바뀐 것 등 사실관계의 착오가 상당 부분 있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원본의 한계를 수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서?회고록 등 여러 자료들을 광범위하게 사용하여 원문의 내용을 보완하고 비평하였다.
4. 현장성의 원칙
: 『백범일지』의 현장성을 더욱 높이기 위해 이 책에서는 본문의 흐름과 밀접한 관련하에서 사진?문서?지도 등의 자료를 적절하게 활용하여 편집하였다.
5. 보완성의 원칙
: 이 책에서는 원자료의 추적을 통해 정리된 새로운 내용을 기초로 하여 「백범 연보」를 전면적으로 교정하였으며, 「인물 찾아보기」를 전면적으로 재정비하였다(양장본에는 「대가족 명부」와 「백범일지 판본에 대한 해제」, 「참고문헌」이 추가로 포함되어 있다).
원본 『백범일지』에서는 ?7월 27일 사형 집행 시간이 반일(半日)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가 다시 ?8월 26일 고종이 전화로 사형 집행 정지를 지시했다?고 하여 내용상 모순이 발생하는데, 이 경우 자료를 추적해 보면 음력 8월 26일(양력 10월 2일) 조속한 처리를 촉구하는 인천감리서의 요구에 대해 법부에서 왕의 명령을 받아서 지시를 내리겠다는 전보가 있었을 따름이다. 또한 백범이 치하포 사건으로 옥중생활을 할 때 ?당시는 건양 2년(1897)으로 『황성신문』이 창간된 때라?라는 구절이 있는데, 『황성신문』은 1898년 9월 5일 창간된 신문으로 1898년 3월에 탈옥하는 백범이 옥중에서 볼 수 없는 신문이다. 따라서 원본에서 거론되는 『황성신문』은 모두 1896년(건양1년)에 창간된 『독립신문』인 것이다.
또한 치하포 사건으로 백범에 의해 피살된 쓰치다(土田讓亮)의 신원에 대해서는 원본의 ?육군 중위?라는 언급 외에는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 『백범일지』에서는 규장각 자료와 일본 동경 외무성사료관의 자료를 추적하여 그의 신원을 최초로 규명하였다. 즉 그는 나가사키현(長崎縣) 대마도(對馬島) 이즈하라(嚴原) 출신의 무역상으로 계림장업단(鷄林?業團)의 핵심단원이었다. 계림장업단은 일본 정부의 강력한 지원과 주조선 일본영사관의 지휘를 받고 있는 반관반민의 단체로, 일본의 상공 및 수산 기타 800여 업종의 자위(自衛)를 도모하고 상권(商權) 확대와 군사관계를 포함한 광범위한 정보를 모집하는 조직이었다.
이 책에서는 이렇게 원전의 오류를 하나하나 충실하게 바로잡고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은 중요 사실들을 보완하는 일에 완벽을 기했다.
새롭게 발굴한 『백범일지』 추가본
『백범일지』 하권 뒷부분인 해방 전후의 이야기는, 지금까지 발행된 모든 출간본이 공통적으로 1947년 국사원에서 나온 책을 저본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의 내용과 분량은 한결같이 국사원본과 같다. 그런데 해방 이후 백범이 구술한 것을 측근이 기록하여 추가시킨 이 내용의 원본 즉 ?추가본?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것은 백범의 유족에 의해서 지금까지 보관되어 왔는데 이 책의 주해자인 도진순 교수의 요청으로 공개되었던 것이다.
국사원본과 원본을 비교해 보면, 국사원본에 수록된 내용의 분량은 원본의 2분의 1 정도로 축약되어 있었음이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발굴된 원본에는 새로운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 그간 신문 등으로 추적하지 못했던 해방 이후 격동기 백범의 행적을 소상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책은 그 추가본을 발굴하여 빠짐없이 실었으며, 각주를 통해 내용을 보완하였다.
[예스24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