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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수분직장인독서회
문화행사

4월 정기모임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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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홍진 작성일12-03-19 00:19 조회1,87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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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4월 화수분독서회 모임안내 ≫  1. 일 시 : 2012. 4. (일) 오후2시  2. 장 소 : 시립도서관 3층 왼쪽 끝(디지털방 옆) 독서회방  3. 토론도서 : "논어." / 김형찬 옮김/ 홍익 출판사 ========================================================== 책소개 ≪ 2012년 4월 화수분독서회 모임안내 ≫  1. 일 시 : 2012. 4.8 (일) 오후2시  2. 장 소 : 시립도서관 3층 왼쪽 끝(디지털방 옆) 독서회방  3. 토론도서 : " 논 어. " / 김형찬 옮김 지음/ 학고재 출판사 ========================================================== 책소개 김형찬 [역] 1963년 생.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및 철학과 졸업. 지곡서당(芝谷書堂, 태동고전연구소) 한문연수과정 수료. 고려대 철학박사(동양철학 전공). 전 동아일보 학술전문기자. 현 문화디자인연구소 소장. 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저서 : [오래된 꿈], [조선유학의 자연철학](공저), [논쟁으로 보는 한국철학](공저) 등. 논문 : "理氣論의 일원론화 연구", "氣철학에서의 총체적 통찰과 경험적 인식", "전도된 형이상학과 경험세계의 파편들, 그리고 深淵" 등 다수. 공자 [저] 중국 춘추 시대 말기에 활동한 사상가이자 교육자로서 유학의 종장이다. 세계 4대 성인의 한 사람으로,‘공孔’은 성이며 ‘자子’는 존칭이다. 은나라 왕족의 몰락한 후에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그의 아버지는 하급무사였던 숙량흘이었고, 어머니는 안징재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나이가 연로한 관계로 어머니는 니구산에 남몰래 치성을 드려 공자를 낳았고 공자를 낳았을 때, 머리가 움푹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공자의 이름을 구(丘), 자를 중니(仲尼)라고 하였다고 한다.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윈 공자는 불우한 집안 환경으로 인해 18살에 과부가 된 어머니를 모시느라 여러 가지 비천한 일들을 해야만 했고 15세가 되어서야 겨우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으며, 불우한 환경에서 일정한 스승도 없이 학문을 익혔다. 관리로서 지위가 오르면서 도덕정치를 주창하며 뜻을 펼치고자 했으나 현실적인 장벽에 부딪혀 숱한 좌절을 맛보았다. 20대에 이미 노나라에서 무시 못할 인물로 성장하였고 제자들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하였으며 관리로서 지위가 오르면서 도덕정치를 주창하며 뜻을 펼치고자 했으나 현실적인 장벽에 부딪혀 숱한 좌절을 맛보았다. 56세에 이상을 실현할 군주를 찾아 천하를 떠도는 주유열국周遊列國의 길에 올랐지만 아무도 그를 등용하지 않았다. 이에 실망한 공자는 고향으로 돌아와 안회, 자하, 자로 등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더욱 힘썼지만 아들 공리가 죽고, 가장 사랑하는 제자인 안회와 자로도 잇달아 죽는 등 만년에 여러 가지 불행을 겪다가 73세가 되던 해인 기원전 479년에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공자는 예(禮)와 덕(德)과 문(文)이 지배하는 사회를 꿈꾸었고, 그러한 이상을 실현한 주나라를 동경하였으며 소위 권세를 누리는 세력가들이 권력을 농락하는 사태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 꿈을 실현하기에는 현실적인 장벽이 너무나 두터웠고 많은 좌절과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나라를 떠도는 가운데 양식이 떨어지기도 하고 죽음의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한 현실에 염증을 느낀 공자는 노년에 [시경(詩經)][서경(書經)][춘추(春秋)] 같은 책을 엮고[역경(易經)]을 끈이 세 번이나 떨어질 정도로 읽는 한편,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했다. 공자가 세상을 떠난 후 제자들은 그가 남긴 말을 모아서 [논어]를 편찬했다. 그 외에 공자는 [시경詩經] [서경書經] [춘추春秋] 등을 엮었으며 [역경易經]의 전傳을 집필했다.